※ 윤두서
윤두서(1668-1715)는 우리 회화사상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화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1693년 스물다섯 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다.
1712년 45세 때에는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蓮洞)으로
낙향하여 그림과 글씨를 벗하며 보냈는데, 특히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고,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도 은연중 영향을 미쳐 실학적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의 녹우당(綠雨堂)에는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적인 경향을 알려주는 지도며 그림첩 등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그의 소장품 중에는 남종 문인화풍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도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유명한 윤두서의 〈자화상〉과 〈채애도〉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윤씨가전고화첩》과 다수의 그림이 전하며, 저서로는 《기졸(記拙)》이 있다.
※ 안견
현동자(玄洞子) 안견은 조선조 초기 화가 중 가장 뛰어난 화가이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본관은 지곡(芝谷), 자는 가도(可度)이고, 세종,
문종 연간에 도화서의 전신인 도화원(圖畵院)의
화원으로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후대의 화가나 화론가(畵論家) 들이 그를 찬탄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데,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안견은 천성이 총민한데다
고래의 명적(名籍)을 많이 보고 연구하여 그 요체를 터득하고 고금 명가들의 장점을
모두 규합 절충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으며, 그의 산수화는 특히 빼어났다"고 적고 있다.
안견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았고,
안평대군의 수장품 중에 많은 수를 차지한 북송대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여러 화풍을 소화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특출하였으며,
그 밖에도 초상(肖像), 화훼(花卉), 매죽(梅竹), 노안(蘆雁),
누각(樓閣)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그러나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은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한 점밖에 없다. 그 외에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와 〈적벽도(赤壁圖)〉
등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들 작품을 통해서 그의 화풍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그의 그림인 〈몽유도원도〉 한 폭만 보더라도
그의 뛰어난 기량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 이상좌
이상좌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도화서 화원 출신의 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공우(公祐), 호는 학포(學圃)이다.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를 잘 그렸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생애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의하면, 본래 그는 어느 양반의 노비였으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뛰어나 중종(中宗)의 특명으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고 하며,
또한 1544년에 중종의 초상화를 그린 이른바 어용 화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화가인 이숭효(李崇孝)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숭효의 아버지는 이배련(李倍蓮)이라는 기록도 있어서
이배련과 이상좌가 동일 인물인지 혹은 기록상의 오류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들도 모두가 그가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지 진필로 확인되는 것은 없다. 이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작품이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이다.
※ 김명국
김명국(1600-?)은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본관은 안산(安山)이며,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밤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했으며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은 취중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기질은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즉 굳세면서도 매우 호방하고 거친 필법을 보인다.
그의 작품은 조선 전기의 안견파 화풍을 보이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사학파적인 산수인물화이다.
화제는 산수화나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가 주류를 이루는데,
대담한 붓질로 간략하게 표현하면서도 대상의 내면적 세계를 잘 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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