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의 현대성
한국 현대 미술은 '현대'를 잡는 시점이 문제가 있지만, 개화기부터 지금까지 약 9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시기동안 많은 화가들이 등장하고, 서양의 현대미술처럼 여러 가지 변화를 겪어 왔다.
1090년 고희동이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전공한 이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기까지 대략 4백여 명의 한국 미술인들이 일본에서 서양의 미술을 배워 귀국하였다. 고희동이 일본에 가서 서양화를 배웠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써, 조선왕조 중신의 구체제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패러다임의 이동(shift of paradigm)'의 한 예를 보여 준다.
물론 고희동이 도일(渡日)하기 전에도 한국인 외교관이나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으로부터 서양화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서양의 선교사들이나 서양화가들이 서양화를 전파한 선례가 있었지만, 고희동의 일본 유학은 스스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 것이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고희동이 귀국 후에 다시 본연의 동양화로 돌아갔던 일은 주변인으로서의 의식을 보여주는 단면이지만, 고희동 이후의 미술가들은 전공이 서양화가 됐든 조각이 됐든 서양미술을 이식하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였다.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파 신조형주의 등의 모던 아트가 이들에 의해 시도됨으로서 1930년대의 한국 화단은 전통 미술과 서양의 신사조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을 겪게 된다. 이 안에 20대의 청년 작가들이 주축이 된 <현대 미협>의 결성은 한국 최초의 아방가르드 세력의 등장이란 점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성격을 분명히 가르는 기준점이 된다. 더구나 이들의 활동이 집단적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전위운동 본연의 의미와도 부합되고 있다.
유럽의 전후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액션페인팅, 추상표현주의를 받아 들여 한국 동란(6.25)이 가져다준 참담한 전쟁 체험을 조형화한 한국의 앵포르멜은 추상 형식에 동양적 정서와 한국특유의 정신성을 내면화시킨 것이다
6.25 이후 궁핍한 경제적 상황은 대다수의 청년 작가들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도 제공치 못할 형편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계천 상가에서 값싼 안료를 대량으로 사용 기름에 갠 물감을 뿌리거나 긁고 짓이기던 중에 추상적 양식의 그림이 나오게 되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유럽의 앵포르멜과 같았다고 하는 자생론이 거론되기도 한다. 한국의 앵포르멜이 자생적인 것이 됐든 유입이 된 것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사용된 앵포르멜이라는 양식이 당시의 실존적인 분위기에서 배태된 의식을 담을 수 있게 하였다는 점과 아방가르드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전통과 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노력을 했던 사실인 것이다 우리의 미술 중 이러한 현대의 큰 변화를 맞게 한 변화의 시기가 바로 80년대의 미술이다.
그렇다면 우리 미술의 큰 시기였던 80년대의 미술을 알아보기 위해 이전의 우리 미술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근· 현대 한국미술의 흐름
전통회화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1910년대부터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과 미술가의 개념이 변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미술교육과 협회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정규미술학교는 없었지만 1908년 한성미술품제작소의 설립과 함께, 도안과 디자인을 하여 제작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기상 미술공부는 주로 일본으로 유학을 통해서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주체적인 미술의 수입은 아니었다.
서양화의 유입과 더불어 전통화단도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문학의 사실주의 영향을 받아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실경산수를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이용우등 6대가로 불리우는 이들에 의해 일상생활이나 시골풍경을 주로 그리는 동연사와 같은 모임이 생겼는가 하면 동물화, 화조도같은 정물에 대한 관심도 부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이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동양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1930년대 전통화단은 세 그룹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앞 세대의 김은호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주로 채색화를 그리는 화단과 이상범과 제자들의 사실주의 수묵산수화,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통산수가 있다.
한편,1920년대부터 1940년대의 서양화단의 양상은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양식으로 주로 인물화를 그리던 화가들(김인승,이마동) 모더니즘 계열의 인상주의, 야수주의 양식으로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오지호,이인성) 표현주의,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하는(구본웅) 전위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김환기,유영국)
첫째 그룹은 주로 서있거나 앉아 있는 인물상, 누드가 주요 소재였던 반면, 두번째는 인상주의적 풍경화의 경향으로 향토적 분위기가 주로 나타나는데, 황토색, 짙은 갈색이 주로 등장했다. 세번째 그룹에서 정치적 전위로 KAPF가 나타났고, 회화 양식에서는 유럽의 실험적 모더니즘을 수용했다. 김환기, 유영국 등에 의해 추상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것이다.
1950∼60년대 동양화단에서 이상범과 변관식은 계속해서 산수화의 대가로 작품활동을 했으나 일부 동양화가 사이에서는 전통수묵화의 영역에서 벗어난 추상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박래현, 이응노가 있는데, 박래현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지워지고 선과 색의 자유화를 강조함으로 동양화단에 있어 추상의 한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이응로는 60년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문자추상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60년대에 들어서 서세옥, 장운상, 민경갑, 정탁영 등 젊은 화가들은 '묵림회'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전통수묵의 정신성을 현대회화에 도입하려고 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더 나아가 형태를 떠나 먹이 종이 위에 번지는 자발성 등의 추구 등 추상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전쟁 이후 1957년 30년대의 전위그룹에 이어 두 번째 전위그룹이 생겨났다. 박서보, 김창렬,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정창섭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현대미술가협회'그룹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활동을 했다.
이들의 작품은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미술과 유사한 표현정신을 반영하고 있어 '앵포르멜'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는 서정추상이라고도 하는데, 서구가 물질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 한국의 앵포르멜은 정신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탈 앵포르멜 운동은 기하추상의 시도, 옵아트, 오브제 미술 등이 시도되었다. <오리진>,그룹의 작가들은 차가운 추상의 작업을 모색했고,
70년대 중반서부터 한국현대미술은 정착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한국적인 모더니즘 미술이 구현이 된 것이다. 앵포르멜부터 축적된 평면회화와 현대미술만을 취급하는 전시장이 생겨나면서 현대미술은 더 활발하게 전개가 되었으며, 회화의 본질을 추구하여 평면 자체에서 모든 재현을 거부하고, 조형성을 추구했다. 이는 후에 더 심화되서 나중에는 그리는 행위마저 포기하고 가장 단순화시켜 버리는 미니멀 아트로 흐르기도 하게 되었다.
한국 모노크롬의 성격은 평면의 자율성, 순수성을 추구한 것과 더불어 한국인의 세계관이 표현되었다고 평가한다. 즉 한국의 모노크롬은 정신성을 추구한 것이다. 75년 동경화랑에서 개최된 모토크롬 작가들 전시의 서문에 "회화에 쓰인 백색은 물질 이상으로 하나의 정신이며 <백>이라고 하는 한 우주세계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의 자연관, 물질관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삶을 배제한 순수추상의 평면만을 고집한 것에서 지나친 형식주의와 예술지상주의로 치우치고 갈수록 획일화되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술계의 변화는 새로운 80년대의 한국 사회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맞게된다.
다음 현대미술로의 가장 급격하게 발달했던 우리 나라 80년대 미술에 관해 자세히 서술해 보았다.
2. 80년대 한국의 상황(다양한 성향의 신세대 등장과 대중적 이미지 확산)
1980년대는 사회 비판적 미술운동인 민중미술이 우리 나라 미술사상 최초로 집단화되어 일어났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권위적이고 제도적이며 현실 반영이 없는 모노크롬미술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는데, 형식만의 미술은 공허한 것이라 비판하고, 미술은 내용성이 있어야 하며 사회현실을 반영할 것을 주장했다. 선구적 그룹으로 '현실과 발언'이 있고, 임옥상, 오윤 등의 작가가 있다. 그러나 기존화단에서는 이 민중미술을 예술성이 결여된 정치적 선전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1991년 호암미술관에서 <임옥상 전>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의 전시회가 열리는 등 1990년대 인정을 받아 민중미술은 역사 속에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80년대 미술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이 바로 미술계의 구조적 변화이다. 그 구조적 변화 중 하나가 바로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 미술인구의 증폭이다.
이러한 미술인의 수적 증가는 그 만큼의 많은 가치관들을 생겨나게 하였고 이는 자연적으로 기성세대와 신진세대란 갈등구조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갈등현상의 대표적 예가 바로 대중적 이미지의 범람이었다. 이미 60년대부터 팝아트를 통해 나타난 대중적 이미지(히피문화, 허리우드 영화, 대형 선전판 등)는 결코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으나, 80년대 미술에서 보여지는 대중적 이미지의 범람은 가이 폭팔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영향으로는 그러한 대중적 이미지를 소화해 내기 위한 거대한 소비사회의 구조가 그제서야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작가 배출의 길이 넓어졌음을 들 수 있겠다. 국전 폐지 이후 생겨난 다양한 성격의 한국미술대상전이라던가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과 더불어 그에 준하는 다양한 전시체계는 미술계의 다양한 구조층을 가능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여기에 대형미술관과 상업화랑의 대거 출연도 눈에 띄는 현상으로 꼽히게 된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과거의 단선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치열한 경쟁체제가 이뤄짐을 보여주게 되었다.
3. 신 표현주위와 미니멀리즘
위의 서론에서도 언굽 했듯이 70년대의 미술은 개념의 미술 표현이 절제된 미술로 일컬어진다.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으로 대면되는 70년대의 미술은 그야말로 그리지 않는 미술 표현을 거부한 미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나타난 미니멀리즘은 70년대의 그것과는 구분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70년대의 개념, 미니멀은 그릴 것을 그리지 않음으로서 예술가의 특정한 의식의 산물을 표현 예술가의 엘리트적 성향을 중시한 반면, 80년대의 미니멀리즘은 많은 작가들의 배양으로 인해 더 이상 엘리트적인 사고를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이분법적인 분류의 추상적인 경향에서만이 아닌 폭넓은 행위의 자율성을 점검하게 되어 단순히 그리지 않는 것이 아닌 표현행위의 자각행위로 나타나 강한 자기 목적적 표현주의의 일반성격과 그 맥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많은 이미지의 사용(일상, 도시. 사회적 사상)과 이전 전통적인 캔퍼스와 안료 같은 수단을 버리고 갖가지 물질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오브제의 도입 등을 통해 이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삼차원의 표현 확대를 가져 왔다는 점에서 70년대의 그것보다 확대현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 일어난 표현의 확대는 행위 예술(퍼포먼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60년대 초 헤프닝에서 비롯한 행위예술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이전 화가들의 연극이 아닌 그 자체로서의 예술이 되는 적극적인 형상화 작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신 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을 통해 나타난 표현 수단의 확대는 이후 한국미술의 변화에 아주 큰 일조를 하게 되었다.
4. 포스트모더니즘과 민중적 이미지 전개
80년대를 통상 전.후로 구분을 한다. 이는 특징적인 몇 가지 현상 등에 의해 나눠지는데 이러한 특징은 대체로 전반이 70년대를 극복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이 첨예하게 나타난 반면 후반은 모더니즘의 후기적 양상이나 민중적 이미지의 예술에 그 나름의 형식적인 점검이 활발히 전개되어 막연한 민중 미술의 형식이 구체적인 매체로서 부각되게 되었으며 일종의 현장그림, 걸개 그림, 대중의 교화수단으로 설명적 그림으로의 형식을 띄다가 집회나 데모의 현장에 설치 그 기능이 점검되기에 이르게 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러한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한 민중적 이미지가 지니는 80년대의 한 특징인 해체의 한 방법을 더욱 발달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후기적 양상은 표상의 문제에서도 국제적인 신 표현주의 운동과 정신적인 견인을 유지하면서도 표상 내용이나 방법 면에서 우리 나름의 특수성을 강하게 반영하게 된다.
예컨데 신 표현주의가 사적, 개인적 신화에 근거를 둔 자기 고백과 체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문제로서 성과 폭력 그리고 페미니즘, 역사주의와 신화체제, 반문명적 요소 등은 대단히 다양점에 비해 이러한 신 표현적 경향이 민중권 미술에서는 극히 소재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집단의식의 표현으로 인한 표현의 자유화가 대단히 위축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5. 수묵운동과 한국화의 변화
전통적 회화인 한국화에서도 80년대의 모습은 서양화나 다른 조형영역에 비해 과거 어느때 보다도 활발한 양상을 띄게 된다. 이중 하나가 바로 수묵화운동으로, 이것은 전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나온 것이었다.
수묵만으로 표현매체를 제한하고, 먹의 미묘한 농담의 다양성을 파고듦으로 수묵을 통한 고유한 정신세계를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오랫동안 관념적 세계와 소재주의에 안주해 왔던 동양화단의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부적인 자극에서 보다 내부적 충동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과 일련의 실험적 추세가 소재나 재료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전개 된 점에 비해 수묵이라는 한정된 재료를 통한 내면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점검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화단의 변화는 후기로 갈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80년대 후반 수묵화와 상대적인 채색화와 이를 혼용한 개념인 채묵화가 이 한국화 운동에 또 다른 그룹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후반 초기의 수묵화 운동이후 표현의 다양성이 구가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우리 고유의 정서 체계를 과거의 여러 형식 속에서 발굴해 내는 실험적 노력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6. 장르해체와 상호 침투현상
80년대 갑자기 서울 시내에는 많은 환경 조형물, 환경 조각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조형물은 대부분 환경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예술성에 대한 문제로 조각 예술의 발전보다 타락이란 국면에서 그 심각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조형물과 더불어 80년대 들어서 나타난 야외 조각장의 등장은 서울 교외와 제주 등지에 조각 공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의 활성화는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올림픽 야외 조각공원에 대구모의 야외 조각장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각 전반에 걸쳐 새로운 경향이란 미니멀리즘에서 표현주의의 변화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인체에 대한 소재적 탐구와 더불어 내용주의로 설명될 수 있는 풍격적인 요소의 현저한 등장과 복합적인 매체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추세이다. 풍격적 요소란 지금까지 조각에서 엿볼 수 없었던 어떤 풍경적 단면이나, 사건전개의 단편화, 설화적인 내용의 서술적 전개 방식 등으로 볼 수 있는데 다분히 회화적인 속성을 방불케 하고 있다.
복합적인 매체의 사용은 지금까지 조각에서 보아왔던 단일한 소재 사용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 속에 나무, 돌, 금속, 기타 재료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마치 회화에서 기성의 안료만 사용하지 않고 안료와 더불어 온갖 일상적인 물질들을 혼합해서 사용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 매체의 확대 현상은 표현의 확대 현상으로 간주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각도 회화에 상응하는 신 표현적 성향을 띄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매체의 확대와 더불어 점검되는 현상은 매체의 가소성, 또는 일회성에 대한 관념의 확산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전 매체의 영구성을 중시하던 즉 이로 인해 나타나는 작품의 유물적 존재에 대한 중요성 보다도 제작 과정의 순수성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고 이는 회화와 이에서 출발하게 된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도예의 조각화 추세로 도조(陶彫)는 조각에서 보다 도예가들에 의해 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도예의 영역확대 장르간이 상호 침투 현상이란 면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장르 붕괴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고유한 형식의 해체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음이 도조와 섬유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80년대 미술의 또 다른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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