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1901년부터 1904년 중반까지 피카소의 회화는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피카소는 당시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오가며 작품의 소재를 구했다. 예를 들어 1901~02년에 파리에 있는 생라자르 여자 교도소를 방문하여 그린 감동적인 주제와 인물을 표현한 〈수프 The Soup〉(1902), 1902~03년에 바르셀로나 부랑아들을 묘사한 〈웅크린 여인 Crouching Woman〉(1902)· 〈장님의 식사 Blind Man's Meal〉(1903)· 〈늙은 유대인과 소년 Old Jew and a Boy〉(1903) 등이 있다.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던 당시의 여자 교도소에서 보았던 모성애는 그후 피카소가 전통적인 미술사의 주제를 20세기의 미술 언어로 표현해내기에 적합한 소재를 찾을 때 다시 다루어졌다.
파리로의 이주
1904년 봄 피카소는 파리로 영구 이주할 결심을 했다. 이당시의 작품에는 정신적인 변화, 특히 지적·예술적 환경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유랑 서커스단이나 곡예사라는 주제는 파리에서 새로 사귄 기욤 아폴리네르와 공통된 관심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떠돌이 광대들은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Girl Balancing on a Ball〉(1905), 〈광대 The Actor〉(1905)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아폴리네르와 피카소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특히 피카소가 그린 〈곡예사 가족 Family of Saltimbanques〉(1905)에는 이처럼 그들 자신을 떠돌이 광대와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는데, 피카소는 어릿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아폴리네르는 건장한 광대의 모습이다. 1904년말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났고 1906년 그녀와 함께 고솔로 여행을 갔다. 이때 올리비에를 모델로 〈여인과 빵 Woman with Loaves〉을 그렸다. 그밖에도 그녀는 조각 작품 〈여인 두상 Head of a Woman〉(1909)과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린 〈여인과 배 Woman with Pears〉(1909) 같은 몇몇 그림들을 비롯한 초기 입체파 시기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한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색채는 결코 수월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전통적인 스페인풍의 색조로 되돌아갔는데, 1904년말에서 1906년의 청색조는 도기·피부색·대지를 연상시키는 장미 색조로 나타나 이른바 장미색 시기를 열게 된다(〈하렘 The Harem〉, 1906). 피카소는 특히 1906년 조각적 형태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색채 실험을 한 듯하다( 〈2개의 누드 Two Nudes〉· 〈머리 단장 La Toilette〉).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Portrait of Gertrude Stein〉(1906)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alette〉(1906)에는 이같은 노력이 보이며 원시적인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도 나타나 있다.
그후 1909~12년의 3~4년간 피카소와 브라크는 함께 매우 긴밀한 작업을 하며 이른바 분석적 입체파로 알려진 미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같은 공동 작업은 피카소의 평생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에 감상자들은 물론 비평가들조차 그들의 작품이 단순히 기하학적인 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종종 잘못 이해했다. 그러나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이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 특히 원근법과 3차원적 공간 표현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리얼리티를 제시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예로 그들은 단일하고 제한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도록 복수 시점을 화면에 도입했다. 칸바일러가 간파했듯이 입체주의는 3차원적 표현 방식을 통한 단순한 모방 대신에 대상의 형태 및 공간 속에 그것이 놓여 있는 상태를 '다시 제시'함으로써 닫혀진 형태를 펼쳐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다. 대상·공간·명암, 심지어 색채까지도 단편화시키는 입체주의의 분석적 방법을 아폴리네르는 외과 의사의 시체 해부술에 비유하기도 했다. 1909년 이후, 특히 1909년 여름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그린 풍경화들(〈오르타데에브로의 공장 Factory at Horta de Ebro〉)에서는 이러한 분석적 경향이 특징을 이룬다. 그후 1910년에 〈앙브루아즈 볼라르 Ambroise Vollard〉·〈다니엘 앙리 칸바일러 Daniel-Henry Kahnweiler〉 같은 일련의 밀폐된 초상화를 그렸으며, 1911~12년에는 〈아코디언 연주자 The Accordionist〉(1911)와 같이 악기를 연주하며 앉아 있는 인물들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들에서는 인물과 사물 및 공간이 일종의 격자형 구도 속에 한데 뒤섞여 있다. 색채는 다시 갈색, 황토색, 회색의 단색조로 제한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복수 시점, 복수 기준축(軸), 복수 광원과 같은 서로 일치되지 않는 여러 회화 요소들을 한 화면에 도입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완전 추상의 방향으로 나아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 화면에 추상적·재현적 요소를 모두 삽입하면서 신문 문구들과 같은 2차원 요소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림에 삽입된 노래 제목 '내 귀여운'(Ma Jolie)만으로도 회화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나타낼 수 있는 동시에 당시 피카소의 새로운 연인 에바(마르셀 윙베르)를 지칭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활자체는 회화의 구성 요소가 되기도 하여 다른 회화 영역들이나 곡선형의 모티프에 상응하는 평면적인 회화 요소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림 속에 글자를 삽입하는 것은 또한 입체파 회화가 전통적인 원근법에 따르는 회화에서처럼 그림의 주제를 화면 안으로 후퇴하면서 전달하기보다는 화면의 표면에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또한 캔버스의 모양을 변형시킨 것(예를 들어 타원형)은 입체파 회화에서는 캔버스 자체가 진정한 회화 공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었다.
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는 실제의 종이를 화면에 부착하거나(파피에 콜레) 다른 재료들을 붙여(콜라주) 자족적인 대상으로서의 미술 작품이라는 입체주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발전했다. 이른바 종합적 입체주의(1912~14)라는 이 시기의 화면에는 색채가 다시 등장했고 사포·벽지 등 콜라주된 실제 삶의 편린들이 종종 산업화된 현대문명을 암시했다. 이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는 정물화를 주로 그렸고 때때로 인물 두상을 그렸다. 기타를 암시하는 동시에 귀를 나타낼 수도 있는 곡선과 같이 피카소의 종합적 입체파 작품들에 깔려 있는 복합적인 암시는 익살스런 요소( 〈파이프를 문 학생 Student with a Pipe〉, 1913)로 작용했고,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일변시키는 착상을 낳게 했다. 예를 들어 6점의 〈압생트 잔 Absinthe glass〉(1914)은 청동조각이면서 콜라주(작품 꼭대기에 실제로 은제 차 거르개를 용접해놓았음)이고 또 한편으로 회화(흰 바탕에 점묘법으로 색점들을 찍어놓았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조각도 콜라주도 회화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3차원의 대상이면서 그 표면은 2차원의 특성을 띠고 있어 결국 그것은 실제와 환영 사이를 배회한다. 1915년경 피카소의 생애에 변화가 생겼고 어떤 의미에서 그의 예술의 방향도 바뀌었다. 그해말 사랑하는 에바가 죽었다. 그녀가 앓고 있는 동안에 그린 〈익살 광대 Harlequin〉(1915,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그의 슬픔이 반영되어 있다.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공식 회원이 되지는 않았으나 이 운동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다.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예술은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새로운 차원을 획득했다. 〈아비뇽의 처녀들〉 이래로 피카소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가 주창한 많은 요소들이 내재해 있었다. 예를 들어 입체파 작품에서 불연속적인 윤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거나 인물의 형상을 혼란스럽게 병치해놓은 것에서 확실히 기괴한 형상의 창조를 볼 수 있는데, 브르통은 특히 〈속치마 차림의 여인 Woman in a Chemise〉(1913)에 주목했다. 또한 어떤 것에서 다른 것을 해독해내는 종합적 입체주의의 개념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옹호한 꿈 같은 이미지와 상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운동이 피카소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주제, 특히 호색적인 주제의 선택이었다. 공공연히 관능적이고 왜곡된 형태들로 이루어진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주제의 수많은 작품들(연작 〈디나르 Dinard〉, 1929)은 분명히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며, 반면에 관람객들에게 왜곡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심리적인 목표들 가운데 하나를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예를 들어 1930~35년의 소묘 및 회화 연작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rucifixion〉). 1930년대에 그는 많은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변형이라는 개념을 종종 주제로 삼았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는 인간과 짐승간의 투쟁을 상징했는데 피카소의 작품에는 그러한 생각을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일종의 자화상 구실을 한다.
마침내 피카소는 시를 써서 가장 강력한 초현실주의를 표현했다. 그는 1934년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35년 2월에서 1936년 봄까지 1년간 사실상 회화를 포기한 상태로 시쓰기에만 매달렸다. 그의 시들은 〈카예 다르 Cahiers d'Art〉(1935)와 〈라 가세타 데 아르테 La Gaceta de Arte〉(1936, 테네리페)에 발표되었다. 몇 년 뒤에 그는 초현실주의 희곡 〈꼬리 잡힌 욕망 Le Désir attrapé par la queue〉(1941)도 썼다.
맹인의 식사, 1903..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아비뇽의 처녀들>(1907). 현대미술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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